문화

이중섭의 연애편지부터 박서보의 묘법까지…수채화의 재발견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그려낸다. 붓은 거침없이 물줄기를 쏟아내며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1941년, 스물다섯 청년 이중섭이 사랑하는 연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속에는 설렘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한국 근현대 수채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수채: 물을 그리다'는 이중섭의 엽서화 18점을 포함, 구본웅, 곽인식, 류인, 박서보, 박수근, 이두식, 이인성, 장욱진 등 34명 화가들의 수채화 100여 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채화'만을 주제로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작품만 23점에 달합니다." 전시를 기획한 정재임 학예사는 그동안 수채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이인성과 같이 유화뿐 아니라 수채화에서도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준 작가들의 작품조차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수채화는 1884년 '한성순보'에 '수화(水畵)'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했다. 이후 1911년 '매일신보'에는 일본 화가 야마모토 바이카이가 연필화, 수채화, 유화 등을 가르친다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수채화는 한국 근대 서양화 도입 초기에 화가들이 서양화 기법을 익히고 실제 풍경과 정물을 묘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물과 안료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지만, 물의 농도와 붓의 터치에 따라 섬세한 표현이 요구되는, 결코 쉽지 않은 장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채화는 오랫동안 유화에 비해 '습작' 혹은 '아이들 그림' 정도로 치부되며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편견을 깨고,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수채화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재조명한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32년에 제작된 서동진의 '뒷골목'이다. 대구 수채화단의 선구자인 서동진은 20세기 초 대구를 중심으로 수채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인성, 서진달 등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서동진의 가르침을 받은 이인성의 '계산동 성당'(1930년대)은 수채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1902년 영남 지역 최초의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계산동 성당은 현재까지도 대구 서성로에 남아 있으며, 이인성은 섬세한 붓 터치와 투명한 색감으로 성당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장욱진의 '마을'은 작가 특유의 소박하고 정감 넘치는 화풍을 보여준다. 집집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따뜻한 공동체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박수근의 '세 사람'에서는 작가 특유의 거친 질감과 단순화된 형태를 통해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조각가로 잘 알려진 류인은 수채화에서도 대담한 화면 구성과 거친 붓질을 선보이며,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유화 '축제' 시리즈로 유명한 이두식은 수채화 '생의 기원'에서 돌과 나뭇잎 등 자연물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 안에 인체를 숨겨놓는 초현실적인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곽인식은 꽃잎처럼 겹쳐지는 반투명한 작은 타원들을 통해 화면 전체를 꽉 채우는 독특한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박서보는 검은 물감에 흠뻑 적신 닥지를 손으로 밀고 나가며 우연적인 흔적을 남기는 중기 '묘법'을 선보이며, 추상 수채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수채화는 불투명하게 섞이지 않고, 각자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이러한 포용과 어울림의 속성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전시의 의미를 설명했다.

 

'수채: 물을 그리다' 展은 단순한 미술 작품 전시를 넘어,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숨겨진 보석들을 재발견하고, 수채화라는 매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계속되며, 관람료는 성인 2000원이다.

 

맨유의 위험한 도박, '유리몸' 토미야스 영입은 독이 든 성배?

 한때 아스널의 견고한 수비수로 활약했던 토미야스 타케히로가 처참한 부진의 늪을 지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로 향할 수 있다는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재능은 확실했지만, 끝없는 부상에 발목 잡혀 아스널에서 방출된 그에게 세계적인 명문 구단이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부활을 향한 희망가이기보다, 위험천만한 도박에 가깝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토미야스의 유럽 커리어는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벨기에와 이탈리아 무대를 성공적으로 거치며 빅리그에서도 통하는 수비 재능을 입증했고, 2021년 아스널에 입단하며 정점을 찍었다. 입단 초기, 오른쪽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보여준 안정적인 수비력과 다재다능함은 그가 프리미어리그에 연착륙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그러나 악몽은 곧 시작됐다. 고질적인 부상은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특히 유로파리그에서 당한 심각한 무릎 부상은 치명타였다. 아스널에서 머무는 동안 무려 14차례의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 그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결국 지난 시즌 단 6분 출전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남긴 채, 구단과의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며 FA 신분이 되었다.현재 최악의 부진에 빠진 맨유가 이적료 없이 영입할 수 있는 FA 선수 명단에 그를 포함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이 리스크’ 도박에 가깝다. 과거 여러 수비 포지션을 소화하던 다재다능함은 매력적이지만, 지난 시즌 단 6분 출전에 그친 선수의 경기 감각과 몸 상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불확실성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그를 영입하기엔 맨유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결국 토미야스의 맨유행은 부활을 꿈꾸는 선수와 반등이 절실한 구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가능한 시나리오다. 만약 성사된다면 카가와 신지 이후 10년 만에 맨유 유니폼을 입는 일본인 선수가 되지만, 그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해 보인다.